정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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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족 정보
|이름 = 정조<br><small>正祖</small>
|그림 = King JeongJo of Joseon.jpg
|작위 = 조선의 왕세손
|작위2 = [[조선의 국왕|조선의 제22대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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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위 기간 중 왕권 강화를 위한 노력에 치중하였으며, 친위부대인 [[장용영]]의 창설과 자신의 저서 《홍재전서》를 비롯한 문집과 법전의 재간행, [[수원 화성]] 축성 등을 추진하였다. 무예와 함께 [[유학]]의 각 경전에도 두루 통달하여 경연장에서 신하들을 강의하기도 했다고 한다. 조선 후기의 중흥기를 이끈 대표적인 군주로 평가된다. 하지만 [[홍국영]]을 기용하여 측근 가신에 의해 정사가 좌우되는 폐단을 남기기도 하였으며, 승하 직전에 어린 세자가 걱정되어 [[안동 김씨]] [[김조순]]의 딸을 세자빈으로 삼았지만 힘이 한쪽으로 기우면서 자충수가 되어 [[세도 정치]]의 배경이 되었다. 윤지충 사건(신해박해)이후 노론 벽파의 공세가 강화되자 이들 명문가 집안 중에 소외되어 있던 진보적이고 독특한 [[박지원 (실학자)|박지원]] 등의 문장을 이용하여 [[문체반정]]과 같은 필화 사건을 일으켜 반성문을 쓰게 하였다. 또한 지배적이였던 [[서인]](소론 벽파)의 스승이자 예학자인 우암 [[송시열]]을 [[송자]](宋子), [[송부자]](宋夫子)로 성인의 반열에 올리고 국가의 스승으로 선포하였다.
 
본래의 묘호는 '''정종'''(正宗)으로, 사후 시호는 '''정종문성무열성인장효대왕문성무열성인장효대왕'''(正宗文成武烈聖仁莊孝大王)이며 존호는 장휘(莊徽), 이후 묘호가 정종에서 정조로 바뀌고 대한제국 때 선황제(宣皇帝)로 추존하고 존호를 더하여 정식 시호는 '''정조경천명도홍덕현모문성무열성인장효선황제'''(正祖敬天明道洪德顯謨文成武烈聖仁莊孝宣皇帝)이다.
 
== 즉위 이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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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 ===
[[파일:Korea-Yeongjo-King of Joseon-c1영조어진.jpg|섬네일|293x293px293x293픽셀|할아버지 [[조선 영조|영조]]]]
{{참고|조선 장조}}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는[[조선 장조|사도세자]]는 [[1749년]](영조 25년)부터 [[조선 영조|영조]]를 대신하여 대리청정을 하였다. 당시 세자의 나이는 15세였다. 영조는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겼으나 그의 일 처리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질책하였고, 임금의 자리를 넘겨주겠다고 짐짓 떠보기도 하여 세자는 홍역을 앓는 와중에도 돗자리를 깔고 사죄하기도 하였다.<ref>이이화, 《한국사 이야기 14:놀이와 풍속의 사회사》, 한길사, 2001년, {{ISBN|89-356-5153-2}}, 69쪽</ref> 정조가 태어난 해인 1752년(영조 28년) 영조는 병중에도 사도세자가 올리는 탕약을 받지 않아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었다.<ref>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_king.jsp?id=kua_12810029_006&tabid=k 영조 78권, 28년 10월 29일(병진) 6번째기사 / 왕세자가 성상의 노하심을 걱정하다]</ref>
 
사도세자는 아버지인 영조와의 불화로 심리적인 위기를 겪었다. 장인이었던 [[홍봉한]]에게 보낸 편지에서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으니 남몰래 약을 지어 보내달라”고 요청하기도 하였다.<ref>[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7/06/15/2007061500165.html `사도세자 심경 토로' 편지 발견], 조선일보, 2007년 6월 15일</ref> 심리학자 강현식은 사도세자가 [[우울증]]이기 보다는 오히려 [[조증]]과 함께 감정 통제가 되지 않는 심리 상태를 보였다고 판단하면서 이는 [[조선 숙종|숙종]], 영조, 정조 모두에게서 나타나는 집안 내력이라고 보고 있다.<ref>강현식, 《심리학으로 보는 조선왕조실록》, 살림, 2008년, {{ISBN|89-522-1018-2}}, 254-263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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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스스로가 [[조선 경종|경종]] 시절 노론의 힘을 업고 왕세제(王世弟)가 되어 즉위할 수 있었기때문에 영조의 탕평책 역시 노론의 입장을 두둔할 수 밖에 없었다.<ref>김형자, 〈사도세자는 왜 뒤주에 갇혀 죽었을까〉, 한국역사연구회,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2》, 청년사, 1996년, {{ISBN|89-7278-319-6}}</ref>
 
[[1762년]](영조 38년) 윤5월에 영조는[[조선 영조|영조]]는 사도세자를 폐위하고 뒤주에 가두었으며 사도세자는 뒤주에 갇힌지 8일 뒤에 죽었다.<ref>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_king.jsp?id=kua_13805121_002&tabid=k 영조 99권, 38년 윤5월 21일(계미) 2번째기사 / 사도 세자가 훙서하다. 왕세자의 호를 회복하다]</ref> 영조는 사도세자가 죽은 뒤 그를 복위시키고 사도라는 시호를 내려 장례를 치렀다. 장례를 치른 후 얼마 지나지 않은 8월 26일 사도세자의 장인인 홍봉한은 상소를 올려 사도세자의 죽음이 병때문에 일어난 어쩔 수 없는 일이라 하였고, 영조는 금등고사<ref group="주해">금등(金縢)은《서경(書經)》의 한 편명(篇名)으로 쇠줄로 봉한 궤짝을 말한다. [[주 무왕|무왕]]이 [[은나라|은]]을 토평하고 이태 만에 편찮게 되자 [[주공 단|주공]]이 제단을 만들고 조상인 태왕·왕계·[[주 문왕|문왕]]에게 고하여 자신이 무왕의 목숨을 대신하겠다 빌고 돌아와 그 축책을 괘에 넣어 봉했다. 그 뒤 관숙·채숙·곽숙이 주공이 조카 [[주 성왕|성왕]]의 자리를 노리고 있다고 유언 비어를 퍼뜨리자 주공은 동도인 낙읍으로 물러갔다. 2년 뒤 유언비어를 퍼뜨린자를 알아내어 시를 지어 금등과 함께 성왕에게 주자 성왕이 의심을 풀었다.</ref>를 언급하며 더 이상 이일을 언급하지 못하도록 하였다.<ref>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_king.jsp?id=kua_13808026_002&tabid=k 영조 100권, 38년 8월 26일(병진) 2번째기사 / 사도 세자의 죽음과 관련한 좌의정 홍봉한의 차자]</ref>
 
=== 세손 시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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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규장각 ====
{{본문|규장각}}
정조는 즉위 후 [[창덕궁]] 후원에 영조의 글, [[어진]], 유품 등을 모아 보관할 건물을 짓고 규장각이라고 하였다. 규장(奎章)은 [[28수]]의 규성(奎星)에서 이름을 딴 것으로, 규성은 문장(文章)을 관할한다고 여겨져 왔다. 규장각은 선대 왕의 유품을 보관하는 왕실박물관이자 왕실도서관으로서 중국의 사신이 가져온 선물도 이곳에 보관하였다. [[조선 세조|세조]]와 [[조선 숙종|숙종]]도 규장각을 설치한 적이 있다.<ref>이이화, 《한국사 이야기 15:문화군주 정조의 나라 만들기》, 한길사, 2001년, {{ISBN|978-89-356-5154-2}}, 42쪽</ref> 규장각에는 두 명의 [[제학]](提學)과 두 명의 [[직제학]](直提學)을 두었는데, 제학에는 황경원, 이복원을 임명하였고 직제학으로는 홍국영과 유언호를 임명하였다.<ref>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_king.jsp?id=kva_10009025_002&tabid=k 정조 2권, 즉위년 9월 25일(계사) 2번째기사 / 규장각을 창덕궁 금원의 북쪽에 세우고 제학·직제학·직각·대교 등 관원을 두다]</ref> 네 사람 모두 시파로 정조의 정책에 호응하는 사람이었을 뿐만 아니라 홍국영을 관여케 한 점으로 보아 규장각 설치가 처음부터 단순한 도서관이 아니라 왕권강화를 위한 친위세력 형성에 목적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ref name="이이화15_44">이이화, 《한국사 이야기 15:문화군주 정조의 나라 만들기》, 한길사, 2001년, {{ISBN|978-89-356-5154-2}}, 44쪽</ref>
 
[[1779년]](정조 3년) 규장각에는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서이수]] 등 네 명이 검서(檢書)로 임명되었다. 이들은 모두 서류(庶類)<ref group="주해">[[서얼]] 신분을 뜻함. 유득공은 본인 스스로는 적자이나 선조 가운데 서얼 출신이 있어 서류 신분이 되었음.</ref> 신분이었고<ref>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_king.jsp?id=kva_10303027_003&tabid=k 정조 7권, 3년 3월 27일(신해) 3번째기사 / 내각에 처음으로 검서관을 두다]</ref>, 정조는 이들을 발탁한 이유로 “이덕무, 박제가 등은 문장은 마음에 들지 않지만, 이들의 처지가 남과 다르기 때문에 스스로 능력을 드러내도록 돕고자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ref>임영택 박현찬, 《한 권의 책이 한사람의 인생을 바꾼다》, 위즈덤하우스, 2013년, {{ISBN|89-6086-606-7}}, 〈서경과 정조〉</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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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장용영}}
 
"없는 군사는 도태시키고 낭비되는 군량은 줄여 나가야 한다"고 주장하여 새롭게 장용영을[[장용영]]을 세우는 대신 기존의 5군영에서 [[수어청]]과 [[총융청]]의 폐지를 관철시키는 한편, 군영의 장군 임명은 병조판서를 통해 임금이 재가하도록 하여 군 인사권에 대한 국왕의 통제권을 강화하였다.<ref>이이화, 《한국사 이야기 15:문화군주 정조의 나라 만들기》, 한길사, 2001년, {{ISBN|978-89-356-5154-2}}, 58쪽</ref> 기존의 5군영은 외척을 비롯한 여러 권신들에게 장악되어 있었고 인사권 또한 사실상 임금에게 있지 않았기 때문에 정조는 이를 일원화하고자 하였으나 창설의 목적과 규모가 서로 달라 이를 통합하기가 쉽지 않자 새롭게 군영을 만들게 된 것이다.<ref name="내일_9호_51">오종록, 〈왜 다시 정조의 개혁을 주목하는가〉, 《내일을 여는 역사 9호》, 서해문집, 2002년, {{ISBN|89-7483-162-7}}, 51-52쪽</ref>
 
정조는〈병학통〉을 직접 지어 군사 훈련을 중요시 하였고, 정기적인 훈련을 감독하는 한편 직접 군사를 지휘하기도 하였다. 30 명에서 출발한 장용영은 수원으로 진영을 옮긴 뒤 18,000 명까지 늘어났다.<ref>KBS 역사야 놀자 제작팀, 《역사야 놀자. 1: 조선시대(KBS 역사 프로그램)》, 경향미디어, 2009년, {{ISBN|89-90991-79-X}}, 56쪽</ref> 장용영의 장교는 무과를 통하여 선발하였는데, 양반의 서얼과 평민 가운데에서도 급제자가 많았다.<ref name="내일_9호_51" /> 또한, 정예병의 훈련을 위해 규장각 검서인 이덕무, 박제가와 장용영 장교인 [[백동수]]에게 훈련교본인 《[[무예도보통지]]》를 간행하도록 하고<ref>임용한, 《난세에 길을 찾다》, 시공사, 2009년, {{ISBN|89-527-5500-6}}, 223-224쪽</ref>, [[1795년]](정조 19년) [[이순신]]의 글을 모아 《[[이충무공전서]]》를 간행하면서 이순신의 일기들을 모아 《[[난중일기]]》라고 이름붙였다.<ref name="공임순">공임순, 《식민지의 적자들》, 푸른역사, 2005년, {{ISBN|89-87787-99-0}}, 106쪽</ref>
 
정조는 아버지인 사도 세자의 헌릉원을 [[수원시|수원]]에 이장한 뒤 [[수원 화성]]을 축조하고, 능행을 명분으로 자주 거둥하였는데, [[1795년]](정조 19년) 을묘 원행에서는 어머니 [[헌경왕후|혜경궁 홍씨의홍씨]]의 환갑을 기념하여 수원에서 과거를 열어 대소 신료와 군사를 이끌고 대규모 원행을 하였다. 장용영의 군사들을 수반한 을묘 원행은 군주의 힘을 대내외에 과시한 것이었다.<ref>박기현, 《왕의 리더십》, 원앤원북스, 2011년, {{ISBN|89-6060-208-6}}, 281쪽</ref> 이때의 원행을 기록한 그림이 〈정조 대왕 능행 반차도〉로 경기감사가 앞을 서고 채제공이 그 뒤를 이었다. 반차도에는 모두 1,779명의 인물과 779마리의 마필이 등장하고 있다.<ref>[http://news.suwon.ne.kr/main/section/view?idx=724049 능행반차도에 보이는 기마고취대, 장엄하다], e수원뉴스, 2013년 2월 13일</ref> 장용영은 정조의 각별한 관심 속에 정예군으로 성장하였으나, 정조 사후 순조를 대리하여 수렴청정을 한 정순왕후에 의해 해체되었다.<ref>《인물과 사상 2007년 12월호》, ISBN AAA2007120, 202-203쪽</ref>
 
[[파일:Hwaseong Neunghaeng Banchado.jpg|650x650px|가운데|섬네일|화성능행반차도(부분). 가마에 쓰인 자궁(慈宮)이라는 표식은 현경왕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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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순왕후 (영조)|정순왕후]]는 15세의 어린나이에 66세의 [[조선 영조|영조]]의 계비가 되었고, [[조선 영조|영조]]가 승하하자 대왕대비(大王大妃)가 되어 왕실의 가장 높은 어른이 되었다. 정조 즉위시 [[정순왕후 (영조)|정순왕후]]의 나이는 불과 31세였다. 정조와 대척점에 있던 정순왕후는 오라비인 [[김귀주]]가 유배 도중 사망한 뒤로 정조를 원수로 여겼다. [[1786년]](정조 10년) 김귀주가 사망한 이후 정조의 후궁이였던 수빈 박씨에게서 아들인 순조를 얻은 후 딸 숙선옹주를 얻었다. 12월 1일 정순왕후는 한글로 된 교서를 승정원에 보내어 이들의 죽음이 수상하니 범인을 찾으라고 하였다.<ref>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_king.jsp?id=kva_11012001_002&tabid=k 정조 22권, 10년 12월 1일(경자) 2번째기사 / 홍국영 상계군 이담 등의 역적됨을 왕대비(王大妃)가 빈청에 언문으로 승정원에 전하다]</ref> 정순왕후는 상계군 이담을 장조(사도세자)의 죽음에 연루시켜 정조의 이복동생이자 상계군의 아버지인 [[은언군]]을 죄인으로 몰았다. 은언군을 죽이라는 상소가 빗발쳤지만 정조는 하나 밖에 남지 않은 이복동생을 어떻게든 살리려고 하였다. 은언군은 결국 강화도로 유배되었다.<ref>이덕일, 《조선 왕 독살사건 2》 , 다산초당, 2009년, {{ISBN|89-93285-72-1}}, 〈제5장 끝나지 않은 비극 - 사도세자의 후예들〉</ref> 은언군은 강화도에서 생을 마쳤다. 훗날 “강화도령”으로 널리 알려진 그의 손자 원범(元範)이 순조의 손자 헌종을 이어 [[조선 철종|철종]]으로 즉위한다.<ref>김대홍, 《그 골목이 말을 걸다》, 넥서스BOOKS, 2011년, {{ISBN|89-5797-349-4}}, 306-307쪽</ref>
 
[[1800년]](정조 24년) 정조는 법적으론 할머니이자 왕실에선 최고 어른인 대왕대비(大王大妃) [[정순왕후 (영조)|정순왕후]]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안동 김씨]] 가문인 김조순의 딸을 세자빈(世子嬪)으로 [[간택]]하였다. 조선 왕조의 가례는 세 번 간택하여 왕비(王妃)를 정하는 삼간택을 하였는데, 정조는 초간택만을 마친 상태에서 승하하였다. 정조가 승하하고 [[조선 순조|순조]]가 왕이되자 왕실의 최고어른인 [[조선의 역대 왕대비|대왕대비]] (大王大妃)로 승격되었으며 [[조선의 역대 왕대비|대왕대비]] (大王大妃) [[정순왕후 (영조)|정순왕후]]는 초간택을 바꾸려 시도하였으나 정조의 유지라는 명분에 밀려 그대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ref>이근호, 《이야기 조선왕조사》, 청아출판사, 2005년, {{ISBN|89-368-0325-5}}, 567쪽</ref> 정조 사후 정순왕후의 수렴청정 기간 동안 노론 벽파가 다시 득세하였지만, 순조가 친정을 시작하자 처족인 노론 시파 안동박김 지원을 받아 벽파를 견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정순왕후가 승하한 이후 벽파가 시파의 반격으로 사멸되고, [[안동 김씨]] 권력 독점은 세도 정치의 폐단을 가져오게 되었다.<ref>한영우, 《다시찾는 우리역사》, 경세원, {{ISBN|89-8341-057-4}}, 439쪽</ref>
 
==== 법제 개혁과 내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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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개혁 조치는 기득권을 쥐고 있던 노론 세력의 반대를 불러 일으킬 수 밖에 없었기때문에, 정조는 노론을 견재할 세력으로 [[남인]]을 중시하고 제반 붕당에서 정조의 정책을 지지하는 인사를 두루 채용하는 [[탕평책]]을 실시하였다. 특히 남인 영수였던 [[채제공]]을 등용하는 등 남인을 중용하여 여러 개혁 조치를 단행할 수 있었다.<ref>신동준, 《왕의 남자들》, 브리즈, 2010년, {{ISBN|89-94013-02-4}}, 260-261쪽</ref> 정조는 《[[대전통편]]》을 간행하여 자신의 개혁 조치가 법제화되도록 하였다.<ref name="내일_09_45">오종록, 〈왜 다시 정조의 개혁을 주목하는가〉, 《내일을 여는 역사 9호》, 서해문집, 2002년, {{ISBN|89-7483-162-7}}, 45쪽</ref>
 
지방 행정에 대해서도 중앙통제를 강화하기 위하여 수령의 임기를 보장하고 서원을 중심으로 한 지방사족이 행정에 관여하는 것을 억제하기 위해 박제가나 [[유득공]], [[박지원]], [[정약용]] 등 측근을 지방관에 임명하기도 하였다.<ref>이이화, 《한국사 이야기 15:문화군주 정조의 나라 만들기》, 한길사, 2001년, {{ISBN|978-89-356-5154-2}}, 73-74쪽</ref> 한편, 수시로 암행어사를 파견하여 지시 사항의 이행 여부와 부정 부패를 감시하였다. 정조는 어느 임금보다 암행어사를 많이 파견하였는데 재위 기간 중 암행어사를 60회 파견하였고, 별건어사를 53회 파견하였다. 파견된 어사 가운데 27명이 초계문신 출신으로 자신의 최측근을 통해 지방의 사정을 파악하고자 하였다.<ref>이이화, 《한국사 이야기 15:문화군주 정조의 나라 만들기》, 한길사, 2001년, {{ISBN|978-89-356-5154-2}}, 83-84쪽</ref>
 
그러나, 정조의 이러한 개혁 조치는 여러 사정으로 인해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었다. 전세를 개혁하고자 하는 노력은 전체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세금을 내지 않는 면세전 문제 때문에 한계가 있었고<ref name="김영수_한국헌법사_152">김영수, 《한국헌법사》, 학문사, 2000년, {{ISBN|89-467-3308-X}}, 152쪽</ref> 정약용은 신분과 지역을 따지지 말고 인재를 쓰자고 제언하였으나 정조 후기까지도 관직은 특정 가문에 편중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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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는 영조 시대부터 이어져온 [[탕평책]]을 계속하여 이어갔다. 조선 중기 이후 조선의 정치는 [[붕당]] 정치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탕평책은 원론적으로 붕당에 연연하지 않고 인재를 두루 등용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나, 실재에 있어서는 신하들의 붕당 위에 국왕의 권위를 먼저 내세우는 왕권 강화 정책이었다.<ref name="서울대2006_184185">한국사특강위원회, 《한국사특강》, 서울대학교출판부, 2006년, {{ISBN|89-7096-115-1}}, 184-185쪽</ref> 영조는 스스로를 군주이자 신하들의 스승인 군사(君師)로 자처하였고<ref>한영우, 《다시찾는 우리역사》, 경세원, {{ISBN|89-8341-057-4}},391쪽</ref>, 집권 후기 정조 역시 자신의 만물을 비추는 달과 같은 존재인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이라 칭하였다.<ref>역사학회 편, 《정조와 18세기》, 푸른역사, 2013년, {{ISBN|978-89-94079-92-9}}, 36-38쪽</ref>
 
탕평책의 실현에 있어서는 영조와[[조선 영조|영조]]와 정조가 차이를 보이는데, 영조가 노론과 소론 등 붕당의 인물 가운데 비교적 온건한 사람들을 등용하여 타협책을 이끄는 완론탕평(緩論蕩平)을 실행하였다면, 정조는 사안의 시시비비를 분명히 가르는 논쟁을 통해 정치를 펼치는 준론탕평(峻論蕩平)을 실행하였다. 정조는 명절(名節)과 의리(義理)를 앞세운 준론탕평을 앞세워 [[소론]], [[노론]], [[남인]] 등에서 준론파를 새롭게 영입하고 기존의 외척과 노론 벽파를 제거해 나갔다.<ref name="서울대2006_184185" /> 그러나, 영조나 정조가 내세운 명리와는 달리 현실의 영조 시대에는 각색 당파가 탕평파와 반대파로 나뉘어 재편된 형국이 되었고, 정조에 이르러서는 [[벽파]]와 [[시파]]로 구분되게 되었다.<ref>김당택, 《우리 한국사 - 정치사중심의 새로운 한국통사》, 푸른역사, 2006년, {{ISBN|89-87787-62-1}}, 282-283쪽</ref> 또한, 사상의 측면에서도 정조의 준론탕평은 이미 시대적 한계와 모순을 드러내던 주자학적 세계관을 극복하지 못하고 오히려 주자학의 의리론을 온존시키는 명백한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ref>역사학회 편, 《정조와 18세기》, 푸른역사, 2013년, {{ISBN|978-89-94079-92-9}}, 43-44쪽</ref>
 
탕평책은 강화된 왕권으로 정치운영을 하여 세력간 균형을 이루고자 한 것이었으나, 기존 정치 세력의 참여 기반은 좁아지고 새롭게 성장하는 세력을 포섭하지도 못하였다. 왕권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운영은 결코 새로운 정치논리를 제시하지 못하였고 점차 보수화 되었다. 결국 관료, 산림<ref group="주해">山林. 향학이나 서원을 중심으로 지방에 거주하던 양반 세력을 가리키는 말.</ref>, 외척 등이 정치적 논리없이 서울과 왕실을 중심으로 가문을 팽창시키는 데 몰두하였다. 그 결과 정조 사후 특정 가문이 권력을 독점하는 [[세도 정치]]가 나타나게 되었다.<ref>《한국역사의 이해》, 계명대학교출판부, 2005년, {{ISBN|89-7585-068-4}}, 152쪽</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