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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훈'''(趙芝薰, [[1920년]] [[12월 3일]] ~ [[1968년]] [[5월 17일]])은 [[일제 강점기]] 이후로 활동한 [[대한민국]]의 [[시 (문학)|시인]]으로, [[청록파]] 시인 중 한 사람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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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은 [[한양 조씨|한양]](漢陽)이고 본명은 '''조동탁'''(趙東卓)이다. [[경상북도]] [[영양군|영양]]에서 태어났다. 독학으로 중학 과정을 마치고서 [[동국대학교]]<ref>당시 혜화전문학교</ref> 에 입학하여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1939년]] 《[[문장 (잡지)|문장]]》지에 〈[[고풍의상]]〉과 〈[[승무]]〉<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659280&cid=46645&categoryId=46645 승무]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f> 를 추천받아 문단에 등장하였다. 광복 후 [[경기여자고등학교]] 교사와 [[동국대학교]] 강사, [[고려대학교]] 교수를 역임했다. [[1961년]] [[벨기에]]에서 열린 [[국제 시인 회의]]에 대한민국 대표로 참석하였다. 이듬해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장에 취임하면서 민족문화 개발에 주력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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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9월 26일 (토) 21:32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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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훈 趙芝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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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정보 | |
출생 | 1920년 12월 3일 일제 강점기 경상북도 영양군 |
사망 | 1968년 5월 17일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 (47세)
국적 | 대한민국 |
직업 | 시인 국문학자 문학평론가 수필가 번역문학가 사회운동가 대학 교수 |
학력 | 경성 혜화전문학교 졸업 |
활동기간 | 1939년 ~ 1968년 |
장르 | 시, 평론, 수필, 번역 |
부모 | 조헌영(부) |
배우자 | 김난희(아명: 김위남) |
자녀 | 슬하 3남 1녀 셋째아들 조태열(趙兌烈) |
친지 | 조동진(형) 조승기(증조할아버지) |
조지훈(趙芝薰, 1920년 12월 3일 ~ 1968년 5월 17일)은 일제 강점기 이후로 활동한 대한민국의 시인으로, 청록파 시인 중 한 사람이다.
일생
본관은 한양(漢陽)이고 본명은 조동탁(趙東卓)이다. 경상북도 영양에서 태어났다. 독학으로 중학 과정을 마치고서 동국대학교[1] 에 입학하여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1939년 《문장》지에 〈고풍의상〉과 〈승무〉[2] 를 추천받아 문단에 등장하였다. 광복 후 경기여자고등학교 교사와 동국대학교 강사, 고려대학교 교수를 역임했다. 1961년 벨기에에서 열린 국제 시인 회의에 대한민국 대표로 참석하였다. 이듬해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장에 취임하면서 민족문화 개발에 주력하였다.
청록파의 한 사람으로 명시를 많이 남긴 조지훈의 시는 주로 자연, 무속, 선을 소재로 한 민족다운 색채가 짙고 불교 세계를 향한 관심은 종교의식을 일깨워 작품에 반영되었다. 박목월과 박두진을 비롯한 다른 청록파 시인이 후에 시 세계를 근본으로 변혁했는데 조지훈은 초기 자연과 친화한 시 세계를 꽤 많이 유지하였다. 1956년 자유문학상을 받았다. 그 후로도 활발히 문학 활동을 하며 고려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던 중 1968년 5월 고혈압으로 토혈한 후 입원, 고혈압과 기관지확장증의 합병증으로 5월 17일 끝내 타계했다.
시집으로 《청록집》과 《조지훈 시선》이 있고 수필집 《창에 기대어》, 논문집 《한국 민족운동사》 이 있다.
생애
일제 강점기
광복 이후
- 1947년 2월,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결성에 중앙상임위원으로 참여
- 1947년 10월, 고려대학교 국문학 교수
- 1949년, 한국문학가협회 중앙상임위원
- 1960년, 한국교수협회 중앙위원
- 1961년, 국제시인회의 한국대표
- 1963년,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소장
- 1967년, 한국시인협회 회장
- 1967년, 한국신시60년기념사업회 회장
- 1968년 5월 17일 사망
학력
서훈
주요 작품
시집
- 조지훈.박목월.박두진,《청록집》, 1946
- 《풀잎단장》, 1952
- 《조지훈시선》, 1956
- 《역사앞에서》, 1959
- 《여운》, 1964
시론
- 《시의 원리》, 1953
수상 및 평론집
- 《창에 기대어》, 1958
- 《시와 인생》, 1959
- 《지조론》, 1962
- 《돌의 미학》, 1964
번역서
- 《채근담》, 1959
논문
- 《한국문화사 서설》, 1964
- 《신라국호연구논고》, 1955
- 《한국민족운동사》, 1964
- 《신라가요연구논고》, 1964
- 《수투전고》, 1966
가족 관계
- 초대, 제2대 국회의원을 지낸 조헌영의 3남 1녀 중 둘째아들이다.
- 아내 : 김위남(金渭男) 여사[3], (나중에 김위남에서 김난희(金蘭姬)로 개명.)
- 장남 조광렬(趙光烈)
- 자부 고부숙(高富淑)
- 차남 조학렬(趙學烈)
- 자부 이명선(李明善)
- 장녀 조혜경(趙惠璟)
- 사위 김승교(金承敎)
- 삼남 조태열(趙兌烈) : 외교공무원, 스페인 주재 대한민국 대사 역임
- 자부 김혜경(金惠卿)
같이 보기
각주
- ↑ 당시 혜화전문학교
- ↑ 승무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 조지훈 전집 저자소개
참고 자료
바깥 고리
- 조지훈 《국어국문학자료사전》1998, 한국사전연구사
- 조지훈, 《지조론(志操論)》, 우리말사랑 웹사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