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이동

낙동강 방어선 전투: 두 판 사이의 차이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편집 요약 없음
편집 요약 없음
34번째 줄: 34번째 줄:
{{국기그림|PRK}} [[최용건]]
{{국기그림|PRK}} [[최용건]]
{{국기그림|북한}} [[김책]] <br/>
{{국기그림|북한}} [[김책]] <br/>
{{국기그림|북한}} [[김무성]] <br/ >
{{국기그림|북한}} [[김무정]] <br/ >
{{국기그림|북한}} [[김웅]]
{{국기그림|북한}} [[김웅]]
|병력2=
|병력2=

2015년 2월 24일 (화) 21:25 판

부산 부근 전투
한국 전쟁의 일부
날짜1950년 8월-1950년 9월
장소
결과 한국 전쟁에서 국군과 UN군의 역전
교전국

유엔 UN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지휘관

대한민국 정일권
대한민국 신성모
미국 더글라스 맥아더
미국 아서 듀이 스트러블
미국 월턴 워커

미국 조지 스트레트메이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용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책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무정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웅
병력

미국 8군 미국 7 함대
대한민국 대한민국 경찰
한국 대한민국 해군

총합:14만 명
조선 인민군:98,000명

부산 부근 전투(Battle of Pusan Perimeter)는 한국 주둔 국제연합 사령부와 북한 사이에 벌어진 거대한 전투로 1950년 8월 4일부터 같은 해 9월 18일까지 벌어졌다. 이 전역은 한국 전쟁 사상 주요한 전투 중 하나였다. 한국군의 패퇴를 막기 위해 투입된 유엔군 병력 14만 명이 조선 인민군 98,000명의 마지막 침공을 막기 위해 돌격했다. 유엔군은 조선인민군의 지속적인 진공에 계속 패퇴하면서 부산 부근선까지 물러났는데, 이 방어선은 부산항을 비롯한 한반도 남쪽의 140km 정도 되는 방어선이었다. 유엔군은 대한민국, 미국, 영국으로부터 온 병력 대부분을 유지하며 조선인민군의 공격을 6주 동안 막아내었고, 전투는 대구, 마산, 포항, 낙동강 일대에서 벌어졌다. 북한의 대규모 공세는 8월과 9월 사이에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유엔군에 의해 오히려 패퇴하여 실패로 끝나게 되었다. 북한군은 보급품 부족과 군대의 대규모 손실로 부산 부근의 방어선이 유엔군에 의해 쉽게 뚫릴 가능성이 있었다. 이에 반해 유엔군은 부산항을 통해 병력, 장비 등을 압도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었고, 전투 동안 해군과 공군은 북한군이 저항할 수 없도록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었다. 6주 후 북한군은 인천 상륙 작전 이후 붕괴되어 유엔군에 의해 패퇴하게 된다. 이 전투로 인해 북한군은 공세를 할 수 없게 되었고, 유엔군은 전세 역전의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발단

전쟁의 발발

한국 전쟁이 발발한 이후 유엔은 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북한)의 침공을 받은 대한민국에 군대를 파병하기로 결정했다. 미국은 북한군의 침공에 반격하고, 대한민국의 붕괴를 막기 위해 지속적으로 병력을 보냈다. 그러나 극동에서의 미군 병력은 2차 세계 대전 이후 꾸준히 약화되었고, 일본에 있던 미국 제8군24보병사단이 대한민국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던 미군이었다. 사단은 조직력이 약했고, 사단 대부분의 무기는 구식이었다. 그 이유는 군을 써야 할 필요가 줄어들었기 때문이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24보병사단은 대한민국으로 파병되었다.[1] 24보병사단은 북한군의 충격 공세를 처음으로 맡은 한국에 파병된 미군 부대였다. 이들의 임무는 북한군의 침공을 최대한 지연시켜 후속 부대의 도착을 위한 시간을 벌어주는 것이었다.[2] 사단은 제7보병사단25보병사단, 제1기병사단 등의 미국 제8군의 지원군이 올 때까지 몇 주간 홀로 북한군의 침공을 지연시키려고 노력했다.[2] 그러나 24보병사단은 7월 5일 오산 전투에서 심한 피해를 입었다. 오산 전투는 미군과 북한군 사이의 첫 전투였다.[3] 스미스 부대의 패배 이후 첫 1달 동안 24보병사단은 지속적으로 패배했고, 북한군의 수적 및 물적 우세로 계속 남하해야 했다. 24보병사단은 천안 전투, 평택 전투에서 패배함으로써 충청도 일대로까지 남하해야 했다.[4][5] 24보병사단은 대전 전투에서 마지막 저항을 했고, 7월 20일까지의 전투 끝에 거의 궤멸되었다.[6] 그 시기 동안, 제 8군의 전투 병력은 북한군의 수와 거의 비슷했고 새로운 유엔군 병력 또한 매일 대한민국으로 도착하고 있었다.[7]

북한군 진공

북한군의 파상공세를 보여주는 지도. 부산 부근 방어선은 한반도의 동남쪽 가장자리이다.

대전을 함락시킨 후, 북한군은 부산 부근의 방어선을 모든 방면에서 포위하기 시작했다. 조선인민군 4사단과 6사단이 남쪽으로 빠르게 진격하였다. 두 사단은 유엔군의 왼쪽 측면을 포위하기 위해 협력하였고, 매우 빠르게 세력을 뻗치고 있었다. 그들은 유엔군의 주둔지까지 진격하며 미군과 한국군을 격퇴했다.[8] 동쪽에서는 89,000명의 북한군이 6개의 방향으로 나뉘어 한국군을 기습적으로 섬멸했고, 완전히 추격하기 시작했다. 한국군은 전쟁에 준비가 되지 않았고, 전반적으로 조직력이 약하고 장비가 부족했다. [9] 수적 우세로 북한군은 한국군 38,000명의 고립된 저항을 섬멸한 후 남쪽으로 꾸준히 움직이는 대한민국 부대들의 전선을 붕괴시켰다. [10] 대부분의 한국군은 침공에 맞서 후퇴했다. 1950년 6월 28일,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이 함락되었다. 이는 대한민국 정부와 군대가 더욱 남쪽으로 이동하는 계기가 되었다.[11] 지속적으로 격퇴당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군은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북한군의 공세를 최대한 지연시키기를 바라며 더욱 거세게 저항했다. 남북한의 부대 모두 중요한 몇몇 도시를 점령하기 위해 서로에게 큰 피해를 입히며 싸우게 되었다. 한국군은 영덕-강구 전투에서 영덕을 지키기 위해 치열하게 싸우다 후퇴했으며, 안동 전투에서 북한군의 공세를 막기 위해 저항하였다. [12] 서쪽에서 미군은 북한군의 공세가 멈출 때까지 반복적으로 격퇴당했다. 3군단의 부대 중 하나인 29보병사단은 한국에 새로 투입되었는데 하동 전투에서 7월 27일 섬멸당함으로써 부산 지역으로의 길을 열어주게 되었다.[13][14] 곧, 진주가 19보병연대의 패퇴로 뚫림으로써 부산으로 가는 또 하나의 길목이 북한군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다.[15] 미군 부대는 노치 전투의 측면에서 북한구에 의해 격퇴 당했다. 급증하는 손실로 북한군은 며칠간 재정비를 할 시간을 갖기 위해 서쪽 측면으로 후퇴했다. 이는 양측에게 부산 부근 방어선에서의 전투에 대비할 시간을 벌어주었다.[16][17]

서막

같이 보기

출처

인터넷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