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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리 클린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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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1월 19일 (금) 12:41 판

힐러리 로댐 클린턴
Hillary Rodham Clinton
미국의 기 미국의 제67대 국무부 장관
임기 2009년 1월 21일 ~
전임 콘돌리자 라이스
대통령 버락 오바마
부통령 조 바이든

신상정보
출생일 1947년 10월 26일
미국의 기 미국 시카고
정당 민주당
배우자 빌 클린턴
종교 감리교
서명
1992년의 힐러리 클린턴
1993년백악관에 도착하는 힐러리 가족
클린턴 가족(왼쪽이 빌 클린턴, 오른족 위가 힐러리 클린턴, 아래가 첼시 클린턴)
2008년 2월 3일의 힐러리 클린턴.

힐러리 다이앤 로댐 클린턴(Hillary Diane Rodham Clinton, 조선말: 힐러리 클린턴, 1947년 10월 26일 ~ )은 미국의 여성 정치인이며, 현직 국무부 장관이다. 1993년 ~ 2001년 제42대 대통령을 지낸 빌 클린턴의 부인으로, 남편의 대통령 재직 중 활발한 활동을 하며 세계적으로 관심을 모았으며, 남편의 대통령 임기 말인 2000년 연방 상원의원으로 선출되어 2001년부터 국무장관으로 임명된 2009년까지 재직하였다. 민주당의 유력한 2008년 대통령 선거 후보였으나, 그해 6월 3일 버락 오바마에게 경선에서 간발의 차로 석패하였다. 오바마의 대통령 당선 직후 국무부장관으로 지명되었으며, 2009년 1월 13일 상원의 인준 절차를 통과, 21일에 공식 취임하였다.[1]

초기 생애

어린 시절

일리노이 주 시카고에서 1947년 10월 26일 아버지 휴 엘즈워스 로댐과 어머니 도로시 하월 로댐 사이에서 태어났다. 감리교 신자인 아버지는 웨일스 이민 후손으로, 펜실베이니아 주 스크랜턴 출신이며, 시카고 시내에서 작은 사업체를 운영했다. 힐러리가 3살 때 가족은 시카고 교외의 파크리지로 이주했으며, 힐러리는 그 곳에서 두 남동생과 함께 성장하였다. 힐러리는 파크리지의 평범한 가정에서 평화롭게 성장했으며, 메인사우스 고등학교를 상위권의 성적으로 졸업했다. 파크리지에서 힐러리는 그의 아버지나 파크리지의 다수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공화당에 호감을 가졌으며, 나이가 아직 어려 선거권은 없었지만 1964년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의 보수주의자 대통령 후보인 배리 골드워터를 지지하였다.

대학 시절

고등학교를 졸업한 힐러리는 1965년 매사추세츠 주의 명문 사립 여자대학인 웰슬리 대학교에 입학하여 정치학을 전공하였다. 여기서 청년 공화당 단체에 잠시 몸담았으나 당시 민권운동과 베트남 전쟁에 대한 시각 차이로 차츰 공화당과 일정한 거리를 두게 되었다. 1968년 여름, 그는 공화당의 하원의원 밑에서 인턴으로 일했으며, 대통령 선거 공화당 전당대회에서도 업무 보조를 했으나, 이를 계기로 그의 마음은 더욱 공화당을 떠나게 되었다. 이 선거에서는 민주당의 유진 매카시 후보를 심적으로 지지했다. 1968년 가을, 졸업반 학생으로 웰슬리 대학교 학생회 회장으로 당선되었다. 1969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여 졸업식 때 대표 연설을 하였는데, 이때 언론의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다.

웰슬리 대학교 졸업 후 코네티컷 주 뉴헤이번에 있는 예일 대학교 법학대학원에 입학했으며 그곳에서는 학회지 편집자, 아동학연구소등에서 활동하였다. 1971년 같은 예일대학교 법학과 학생이던 빌 클린턴과 만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차츰 친하게 지내면서 여행도 함께 다니고 같은 집에서 살기도 했다. 빌 클린턴은 옥스퍼드 대학교 유학 관계로 힐러리보다 1년 늦게 입학했으므로 졸업도 늦어졌으나 힐러리는 1973년 학위를 먼저 받은 이후에도 빌의 졸업때까지 1년간 같이 지냈다. 졸업후에 심화연구를 위해 예일 어린이 연구 센터에서 공부를 시작했으며 어린이와 법에 대한 학술 논문을 1973년에 발표하였다.

초기 경력

아칸소 주 시절

1974년 워싱턴 DC에서 워터게이트 사건의 청문회를 위한 탄핵 조사 연구원으로 일하였다. 빌 클린턴이 컬럼비아 변호사 시험에 떨어지고 아칸소 주 시험에 붙자 그녀는 클린턴을 따라 아칸소로 이사한다. 하지만 이것은 당시 그녀의 경력 발전에는 부정적인 일이었다. 그녀와 클린턴은 이 시기 아칸소 대학에서 법학을 가르쳤으며 클린턴은 하원의원에 도전하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클린턴은 계속 청혼해서 1975년 결국 승낙을 하고 1975년 10월 11일에 결혼하였다. 그녀는 결혼 후에도 중간이름을 로댐으로 계속 쓰기로 하였다.

빌 클린턴은 1974년 선거에서 패배하였으나 1976년에 아칸소의 지방법관으로 선출된다. 이때 그들은 아칸소 주의 수도인 리틀 록에서 살기 시작했다. 힐러리는 이때 로즈 법률회사에서 변호사로 일하기 시작하였다.

1977년 어린이 보호 재단인 "어린이와 가족들을 위한 아칸소 대리인협회"의 공동창업자가 되었으며 지미 카터 대통령에 의해 법적지원재단의 이사로 임명되어 1981년까지 일하였다. 그녀는 최초의 여성 회장이었으며 초기 9천만 달러였던 재단예산은 그녀의 임기 동안 3억 달러로 늘어났다.

1978년 빌 클린턴이 아칸소 주의 주지사로 선출되자 그녀를 농촌지역건강지원위원회의 회장으로 임명하였다. 이때 의료혜택을 받지 못하던 아칸소의 가난한 지역들의 의료시설 확충을 위해 노력하여 연방예산을 따내는 실적을 올렸다.

1979년 로즈 법률회사의 공동파트너로 승진하였으며 클린턴이 대통령이 되어 백악관에 들어가기전까지는 그녀의 수입이 항상 남편보다 많았다. 이때 여러 투자로 재산을 모았으나 후일 문제가 된 화이트워터 개발 회사의 부동산 벤쳐 사업에 투자하기도 하였으나 불행한 결말로 끝났다.

1980년 2월 27일 첼시 클린턴를 낳았다. 하지만 같은해 주지사 선거에서 빌 클린턴은 패배하였다. 하지만 2년 후 다시 주지사에 선출되었으며 이때부터 빌 클린턴의 부인으로서 "미세스 빌 클린턴" 혹은 "힐러리 클린턴"으로 유권자에게 많이 알려지게 되며 선거운동을 적극 지원하였다. 1982년부터 1992년까지는 아칸소 교육표준위원회의 회장을 맡아 활약했다. 1987년부터 1991년까지는 미국 변호사 협회의 여성회원 회장을 지냈으며 그동안 네셔날 법학지에서 뽑은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변호사 100인중 한명으로 두 번 선출되었다. 그녀는 이 시기 동안 아칸소 주에 뿌리를 둔 TCBY월마트의 이사진을 지내기도 하였다.

대통령 영부인

영부인 활동

1992년 빌 클린턴이 민주당 대선 후보가 되었고 대통령에 당선되어 1993년 1월 집권을 시작하자 그녀는 미합중국의 퍼스트레이디가 되었다. 그녀는 최초의 석사학위 이상을 가진 퍼스트레이디이기도 하였다. 보통 동관에 사무실을 가지는 대신 그녀는 대통령 집무실이 있는 서관(West Wing)에 집무실을 가졌으며 엘리노어 루스벨트이후 가장 영향력있는 퍼스트레이디가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에 대한 영향력이 적절치 못하다는 비판을 들어야 했다. 하지만 이러한 적극적인 역할은 클린턴 선거 전략에 있어 "하나 가격에 둘을!"이라는 표어로 긍정적으로 활용되었으며 "빌러리"라는 별명도 생겼다.

1993년 클린턴 대통령은 그녀를 국민건강보험 개정을 위한 일을 맡겼다. 이에 따라 클린턴건강보험계획이라는 건의서를 만들었다. 이는 고용자가 피고용인의 건강보험을 보장하도록 하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으며 민주당이 다수당이었음에도 상하원에서 필요한 표를 얻지 못해 1994년 부결되었다. 이때 국민들의 힐러리에 대한 지지율은 50퍼센트 이상에서 1994년에는 44퍼센트로 그해 말에는 35퍼센트로 하락하였다. 이는 1994년 중간선거의 중요사안이 되었으며 공화당은 "힐러리 캐어"라 부르며 반대세력을 모아 결국 공화당에게 상원과 하원 양쪽 모두에서 패배하게 되는 원인중 하나로 작용하였다.

1997년에는 테드 케네디 상원의원과 함께 어린이 건강 보험 프로그램 법안을 만들어 추진하였다. 이 법은 각 주로 하여금 의료혜택을 받지 못하는 가정의 어린이들을 위한 연방차원의 지원을 하려는 계획이었다. 그외 전립선암과 어린이 천식 치료를 위한 기금 조성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걸프 전쟁의 후유증을 앓고있는 참전군인들을 위한 조사활동에서 일하였다. 1997년에는 사법부의 여성폭행방지사무소를 만드는 데 기여를 하였다. 힐러리 자인은 자서전에서 이러한 활동중 가장 애착이 가는 활동으로 1997년의 입양과 안전한 가정을 위한 법률을 만든일을 손꼽고 있다.

르윈스키 추문과 탄핵

1998년 백악관 인턴이었던 모니카 르윈스키와 클린턴 대통령과의 혼외정사에 대한 소문이 떠돌기 시작하였으며 결국 빌 클린턴 대통령의 탄핵에 이르기까지 사건이 번졌다. 힐러리는 이러한 소문에 대해 우익의 음모라고 일축하였고 아무런 잘못이 없음을 믿는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러한 의혹이 사실로 밝혀지자 빌 클린턴과 힐러리 사이의 결혼에 대한 위기설이 퍼졌다. 그러나 그녀는 그들의 결혼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았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후 자서전에서 결혼을 유지해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을 품었으며 클린턴에게 매우 화났었다고 밝혔다. 대중은 그녀가 이러한 사건에서 보인 결단력과 힘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했으며 그녀에 대한 국민 지지도는 이때 71%를 기록하였다. 그녀는 2003년의 저서전에서 결혼을 유지하기로 한 이유에 대해서 "빌처럼 나를 웃게 만들고 이해하는 사람은 이제껏 없었습니다. 그 오랜 세월이 지났어도 그는 내가 만나본 사람 중에서 가장 흥미로우며 정력적이고 활발한 사람이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연방 상원의원

2000년 연방 상원의원 선거

1998년 뉴욕의 상원의원 다니엘 패트릭 모이니한은 은퇴를 발표하였다. 민주당 인사들에 의해 이자리에 출마 할 것을 권유 받은 힐러리는 1999년 9월 뉴욕 북쪽의 차파쿠아에 집을 사고 이주하였으며 상원의원 출마를 발표하였다. 그녀는 전립선암으로 인해 출마를 포기한 루디 줄리아니 대신 공화당의 릭 라지오와 대결하였다. 그녀의 상원의원 출마는 전국적 관심을 끌었으며 이때부터 차기 대권을 노리는 것이 아니냐는 예측을 낳았다. 2000년 11월 7일에 열린 선거에서 55퍼센트의 지지로 당선되었다.

상원 1기 (2001년 ~ 2006년)

상원의원으로서 활동을 시작한 힐러리는 예산위원회, 국방위원회, 환경과 공적사업위원화, 건강/교육/노동/연금 위원화와 노년층을 위한 특별위원회에서 활동하였다. 2001년 9월 11일 테러 참사 이후에는 복구를 위한 기금조성에 노력하였으며 214억 달러의 기금모집을 하는 데 일조하였다.

국방위원회의 상원위원으로서 힐러리는 아프가니스탄에서의 군사 작전을 지지하였으며 탈리반 정권에 억압받는 아프간 여성의 삶을 개선하는 데 이러한 테러와의 전쟁이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또한 2002년 10월 이라크 전쟁에도 찬성표를 던졌다. 이는 이후 대선에서 논쟁거리가 되었다.

상원 2기 (2006년 ~ )

2004년에는 67퍼센트의 득표를 얻어 재선에 성공하였다. 2007년에는 이라크 파병 증파에 반대하였으며 부시 대통령으로 하여금 철수 시한을 정하도록 하는 법에 찬성하였다. 그녀의 뉴욕 상원의원으로 재임하는 동안 지지율은 72퍼센트에서 74퍼센트 정도였으며 대선 출마를 발표할 때는 64퍼센트였다.

2008년 대선 출마

케빈 러드 오스트레일리아 총리(오른쪽)와 함께한 힐러리 클린턴

2007년 힐러리 클린턴은 타임즈와 포브스지가 뽑은 가장 영향력있는 100인의 인물로 뽑혔다. 2007년 1월 20일 그녀는 웹사이트의 동영상을 통해 대통령 선거에 입후보하는 것을 발표하였다. 아이오와 주 예비선거에서는 패배하였으나 2008년 1월 8일에 열린 뉴햄프셔 예비선거에서는 승리하였다. 경선기간동안의 선거예측으로는 만약 민주당 후보로 선출되면 공화당 후보를 이길 가능성이 높다고 나오고 있어 미합중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았으나, 2008년 6월 4일버락 오바마가 과반의 대의원을 확보함에 따라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패했다.

국무부 장관

민주당대통령 선거 압승 직후인 11월 21일, 오바마 당선인은 국민통합과 뛰어난 국정수행 능력을 높이 평가하여, 지난날의 경선 경쟁 후보였던 그를 새 정부의 국무부 장관으로 지명하였다. 2009년 1월 13일, 미국 상원의 장관직 후보자 인사청문위원회 심사를 16-1의 표차로 통과하였다. 이날 청문회에서, 그는 현재 인준절차가 진행중인 대한민국과의 자유무역협정의 재협상의 필요성을 언급하였다.[2] 이에 따라 그는 2009년 1월 21일에 공식 취임하였다. 미국에서는 국회의원직과 장관직의 겸임이 금지되어 있으므로, 그는 취임과 동시에 뉴욕주의 미국 연방 상원의원 직을 자동 반납하게 되며, 데이비드 패터슨 뉴욕 주지사가 그의 후임자를 물색하여, 커스틴 질러브랜드 하원의원을 지명하였다.[3] 질러브랜드는 1월 27일 클린턴의 후임으로 상원의원직에 취임하였다.

주석 및 참고자료

  1. Clinton Is Approved, but Vote on Holder Is DelayedStout, David Stout, 뉴욕 타임스, 2009년 1월 21일 작성
  2. 힐러리 "FTA 재협상" 표명… 여야, 비준시기 공방으로 번져, 서울경제신문, 2009년 1월 15일 작성
  3. 힐러리 후임에 42세 질리브랜드, 조선일보, 2009년 1월 24일 작성

바깥 고리

전임
콘돌리자 라이스
제67대 미국 국무장관
2009년 ~
후임
현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