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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 방어선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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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부근 전투 (한국 전쟁의 일부)
날짜1950년 8월-1950년 9월
장소
결과 한국 전쟁에서 국군과 UN군의 역전
교전국

대한민국의 기 대한민국
미국의 기 미국
캐나다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오스트레일리아
영국의 기 영국
네덜란드의 기 네덜란드
뉴질랜드의 기 뉴질랜드

프랑스의 기 프랑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지휘관

대한민국 정일권
대한민국 신성모
미국 더글라스 맥아더

미국 월턴 워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용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책
병력

미국 8군 미국 7 함대
대한민국 대한민국 경찰

한국 대한민국 해군

부산시 부근 전투는 1950년 8월부터 9월까지 국제 연합군조선 인민군이 낙동강 방어선을 비롯한 경상북도의 여러 지역에서 벌어진 전투들을 묶는 종합 전투이다. 낙동강 방어선 성립부터 인천 상륙 작전까지의 전투들을 포괄하고 있다.

발단

1950년 6월 28일 서울이 점령되자 미국은 자신의 동맹국인 대한민국이 공산 세력에 넘어가서, 아시아에서의 세력이 약화될 것을 우려하였다. 맥아더 장군은 6월 29일, 수원을 방문하여 한국의 문제가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미국 워싱턴 D.C에서 미군을 파병해달라고 요청했다. 미국은 이 문제를 유엔에 올렸고, 소련이 불참한 가운데 미국, 필리핀, 콜롬비아, 에티오피아 등의 16개국이 직접 군대를 파병할 것을 결의했고, 이스라엘, 이탈리아 등의 6개국이 의료지원국으로 참전할 것을 결정했다. 유엔은 더글러스 맥아더를 총사령관으로 삼고 유엔군의 한국 파병을 승인하였다.

유엔군과 국군의 출병

유엔군은 1950년 7월 8일 트루먼 대통령이 맥아더 장군을 사령관으로 임명함으로써 한국의 방어선을 구축하도록 했다. 이미 영국과 미국이 6월 25일부터 6월 26일까지의 주문진항 해전7월 10일포항 상륙 작전을 성공으로 이끈 바 있으나, 미군이 대전, 오산에서 조선인민군의 막강한 화력에 의해 모두 패배하였다. 하지만 국군은 열세임에도 불구하고 조선인민군의 공격을 막아냈고, 이는 공산군의 진격 속도를 늦추었으며, 국군이 신속히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맥아더 장군은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유엔군을 거리상으로 가장 가까운 부산에 상륙시키기로 결정했다. 유엔군은 조선인민군이나 중공군의 공격을 예상했으나, 이는 실현되지 않았다. 8월 말, 조선인민군이 대구영천, 포항 일대를 공격하자 유엔군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판단 하에 8월 부산에 상륙하였고, 미국을 비롯한 참전부대와 일본의 무기가 들어왔다.

경상도에서의 격전

8월 공세

마산 서부에서 벌어진 전투를 보여주는 지도

1차 공세는 8월 달에 시작되었다. 연합군은 제 1차 낙동강 공세에서 조선 인민군을 밀어붙였다. 1차 공세의 첫 접전은 마산에서 발발했다. 1950년 8월 7일부터 UN 킨 장군의 미군과 조선 인민군이 마산에서 붙은 것이다. 미군과 인민군은 일전일퇴를 거듭하며 격전을 벌였다. 킨 장군은 조선 인민군이 마산 서부 일대로 진출하자 이를 막기 위해 곰암리를 공격했다. 8월 15일에는 마산 서북산을 둘러싸고 1달 간 공방전이 벌어졌는데,.

같이 보기

출처

인터넷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