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환 (작가)
김동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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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정보 | |
출생 | 1901년 9월 27일 대한제국 함경북도 경성군 어랑면 금성리 |
사망 | 1958년 3월 6일 | (56세)?(추정)
국적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언어 | 한국어, 영어, 중국어 만주어, 러시아어, 일본어 |
직업 | 시인, 작가, 언론인 |
학력 | 일본 도요 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중퇴 |
경력 | 삼천리 학예부 차장 |
본관 | 강릉(江陵) |
필명 | 아명(兒名)은 김삼룡(金三龍) 호(號)는 파인(巴人) |
활동기간 | 1924년~1950년 |
장르 | 시문학, 수필 |
부모 | 김석구(부), 마윤옥(모) |
배우자 | 최정희(1948년 정식 재혼)[1][2][3] 신원혜(1948년 정식 이혼)[4] |
자녀 | 3남 3녀[5] |
형제 | 누나 2명 여동생 1명 남동생 2명 |
주요 작품 | |
시문학 《적성을 손가락질 하며》 《국경의 밤》 《산 너머 남촌에는》 《봄이 오면》 | |
영향 | |
영향 받은 인물 | 김광섭 등에게 영향을 줌. |
김동환(金東煥(일본식 이름: 白山靑樹 시라야마 아오키), 1901년 9월 27일~몰년(1958년 3월 6일? 이후 사망 추정) 미상)은 일제강점기 시대의 시인이었다.[6] 1924년 시 《적성을 손가락질하며》와, 1925년 시 《국경의 밤》이라는 두 작품으로써, 1920년대의 시문학의 총아로 첫 도약했던 그의 본관은 강릉(江陵)이고, 아호(雅號)는 파인(巴人)이다.
학력
생애
일생
대한제국 함경북도 경성군 어랑면 금성리에서 출생하였고, 지난날 한때 대한제국 함경북도 경성군 금성면에서 잠시나마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으며, 그 후 청나라 만저우 지역 지린 성 지린과 러시아 제국 프리모르스키 지역 프리모르스키 주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대한제국 함경북도 경성군 어대진면에서 잠시 유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경성중동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에 유학하여 도요 대학교 영어영문학과에서 수학하다가 관동 대지진으로 중퇴하고 귀국했다.
함북에서 발행된 《북선일일보》를 비롯하여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등에서 기자로 근무하며 시 창작 활동을 시작했다. 1924년 발표한 〈적성(赤星)을 손가락질하며〉가 본격적인 등단작이다.
장편 서사시 《국경의 밤》(1925)으로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시적 특색으로는 국경 지대인 고향에서 얻은 북방적 정서와 강한 낭만성, 향토적인 느낌을 주는 민요풍의 언어를 들 수 있다.
광복 이후 전력
한때 1948년 9월에서부터 1948년 12월까지 석 달간 한국민주당 당무위원 겸 문화예술행정특임위원 직위를 잠시 역임한 직후 한국민주당을 탈당하였다.
반민족 관련 행위 전력
1929년 종합월간지 《삼천리》와 문학지 《삼천리문학》을 창간해 운영했는데, 일제강점기 말기에 삼천리사를 배경으로 친일 단체에서 활동하고 전쟁 지원을 위한 시를 발표하는 등 활발한 친일 활동을 하였다. 2002년 발표된 친일 문학인 42인 명단과 친일파 708인 명단, 민족문제연구소가 2008년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문학 부문에 선정되었으며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광복 후 이광수, 최남선 등과 함께 문단의 대표적인 친일 인사로 꼽혀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고, 한국 전쟁 때 납북되었다. 1956년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에 참여했다. 그 후 평안북도 철산군의 노동자수용소에 송치되었다가 1958년 3월 6일 이후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친일 작품으로는 지원병으로 참전했다가 전사한 이인석을 칭송하며 젊은이들에게 참전할 것을 촉구하는 시 〈권군취천명(勸君就天命)〉(1943)을 비롯하여 총 23편이 밝혀져 있다.[7] 이는 친일 문학인 42인 명단 수록자 가운데 5위에 해당하는 편수임에도, 창작 작업보다는 단체 활동을 통한 친일 행적이 더 뚜렷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흥아보국단, 조선임전보국단, 황군위문작가단, 조선문인협회, 국민총력조선연맹, 국민동원총진회, 대화동맹, 대의당 등 많은 친일단체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맡았기 때문이다.
3남인 김영식이 김동환의 친일 행적을 인정하고 사과한 예는 친일파로 지적되는 인물의 후손이 조상에 대한 친일 혐의를 인정한 드문 예로 종종 인용된다.[8]
가족 관계
- 아버지 김석구(金錫龜)와 어머니 마윤옥(馬允玉)의 3남 3녀 중 장남이자 셋째(6남매 중 셋째[9]).
- 이전 배우자 신원혜(申元慧, 1903년 6월 19일[10] 출생.~1993년 4월 25일[11] 하세.)[12]
- 재혼한 아내 최정희(崔貞熙, 1912년 12월 3일 출생.~1990년 12월 21일 하세, - 소설가.)와 3남 3녀.
- 첫째 아들 김영사(金英思, 1927년 경성부 출생. 신원혜 소생. 어려서 요절.)
- 둘째 아들 김영창(金英昌, 1930년 경성부 출생. 신원혜 소생. 어려서 요절.)
- 셋째 아들 김영식(金英植, 1934년 경성부 출생. 신원혜 소생.)
- 첫째 딸 김영주(金英珠, 1939년 경성부 출생. 신원혜 소생.)
- 둘째 딸 김지원(金知原, 1942년생.~2013년졸. 최정희 소생.)
- 셋째 딸 김채원(金采原, 1946년 경기도 양주 출생. 최정희 소생.)
주요 작품
- 시 《적성을 손가락질하며》
- 시 《국경의 밤》
- 시 《북청 물장수》
- 시 《산 너머 남촌에는》
- 시 《봄이 오면》[13]
- 수필 《나의 반도 산하》
같이 보기
참고자료
- 권영민 (2004년 2월 25일). 《한국현대문학대사전》. 서울: 서울대학교출판부. 102쪽쪽. ISBN 89-521-0461-7.
- 반민족문제연구소 (1993년 4월 1일). 〈김동환 : 각종 친일단체의 핵심으로 맹활약한 친일시인 (김윤태)〉. 《친일파 99인 3》. 서울: 돌베개. ISBN 978-89-7199-013-1.
각주
- ↑ 1948년까지 최정희와의 재혼은 지난 14년 동안 사실상 중혼이었었다.
- ↑ 보도 자료 리스트
- ↑ 보도 자료 리스트
- ↑ (1926년 신원혜 여사와 첫 혼인을 한지도 22년 후 1948년 정식 이혼.)
- ↑ (장남 김영사, 차남 김영창, 3남 김영식, 장녀 김영주 등의 4명은, 초배 신원혜 여사의 소생이며, 차녀 김지원, 3녀 김채원 등의 2명은, 계배 최정희 소설가의 소생.)
- ↑ 시문학 분야도 그렇고, 수필 작가이기도 하였었으며, 한때 잠시 1948년 12월까지 어언 3개월 동안, 한민당(한국민주당)의 당내에서 정당 관련 활약을 하기도 하였었다.
- ↑ 김재용 (2002년 8월). “친일문학 작품목록”. 《실천문학》 (67호): 123~148쪽. 2007년 9월 28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7년 10월 3일에 확인함.
- ↑ 정운현,최유진 (2002년 8월 17일). “"부친의 '친일 죄과' 민족 앞에 사죄" - [인터뷰] '친일문인' 파인 김동환 3남 김영식씨”. 오마이뉴스. 2008년 5월 29일에 확인함.
|제목=
에 지움 문자가 있음(위치 26) (도움말) - ↑ 아버지 김석구는 김동환이 아직 어릴 때였었던, 1905년 8월 초순(1901년생 김동환이 5세, 1902년 12월 31일생 여동생이 4세, 1904년 3월 5일생 두 막둥이, 즉 막내 쌍둥이 남동생이라는, 쌍막둥이 형제 둘이 모두 아직 2세 때)에,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와, 청나라 만주에서 보따리 장사를 하며 떠돌다가, 10년 후 1915년 10월 초순 당시에, 국민정부 시대 대륙 본토 중화민국 만주 지린 성 지린에서, 일본 제국 일본군 육군에게 살해되었음.
- ↑ 대한제국 함경남도 원산 출생.
- ↑ 대한민국 경기도 수원 지역에서 하세.
- ↑ 김동환 시인은, 1926년 3월 8일 , 신원혜 여사와 첫 결혼하였으나, 그로부터 22년 여만인, 1948년 3월 26일 , 신원혜 여사와 정식 이혼. 이후 김동환 시인은, 그로부터 어언 석달여 남짓 훗날인 같은 해 1948년 6월 5일 , 최정희 소설가와 정식 재혼. 그러나 그로부터 어언 2년 지난 때인 1950년, 육이오 한국 전쟁 당시 서울 마포에서, 갑자기 북괴 인민군 지상군에게 포위 및 습격됨과 동시에, 삼팔선 이북으로 납치됨.
- ↑ (바이올리니스트 겸 서양 고전 클래식 음악가 출신인 작곡가 김동진(한양대학교 명예교수 겸 숭실대학교 석좌교수 역임.)이 클래시컬 멜로디를 써붙이면서, 동명 제목의 가곡 작품으로 작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