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산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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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진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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碧珍國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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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산가야를 포함한 육가야의 위치와 강역. | ||||
정치 | ||||
정치체제 | 군주제 | |||
국왕 42년 ~ ? ? ~ 400년경 | 벽로왕(초대) 유충왕(말대) | |||
인문 | ||||
공용어 | 가야어 | |||
민족 | 변한인 |
한국의 역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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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진국(碧珍國), 통칭 성산가야(星山伽倻)는 경상북도 성주(星州) 부근에 있던 가야의 소국이다. 벽진가야(碧珍伽耶)라고도 하며 육가야 중 하나다. 가락국 시조 수로왕(首露王)과 함께 구지봉에서 태어난 6명의 동자 중에서 다섯째 김벽로(金碧露)가 건국하였다.
역사
[편집]본래 성산가야에서는 벽진국이라는 독립소국이 있었다가 4세기 말 이후 힘이 약해져서 신라 영향권에 편입되었고, 결국 6세기 초에 완전히 신라에 병합되었다고 한다. 성산가야의 수도는 현재의 경상북도 성주였다.
국명
[편집]『삼국유사』 가락국기에서 성산가야를 벽진가야라고 했는데, 이는 성주군 벽진면의 지명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성산이라는 지명은 현재 고령군의 한 면으로서 성산면으로 이어져오고 있다. 지리적 위치로 보아 지금의 성산은 고령가야의 영역에 포함되었던 것으로 여겨지므로, 오해를 막기 위해 성산가야는 벽진가야로 부르는 것이 옳을 듯하다.
벽진(碧珍)의 ‘珍’은 옛 지명에 쓰인 ‘돌’·‘들’의 한자 표기이다. 그러므로 벽진가야는 ‘벽들가야’ 또는 ‘벼들가야’였을 것이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는 성산가야를 “지금(고려 초)의 경산(京山)”이라고 하였다. 경산은 오늘날 성주군의 중심인 성주읍에 있는데, 옛 지명인 경산부(京山府)가 그대로 전해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므로 벽진가야는 지금의 성주군을 중심으로 한 가야였음을 알 수 있다.[1]
역대 국왕
[편집]성산가야의 왕 세계는 김영창의 『6가야국사실록』에 1세 벽로왕, 2세 니차왕, 3세 유충왕의 기록만 전해지고 있다.
대수 | 제호 | 재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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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벽로왕(碧露王) | 42년 ~ ? | 성산가야의 건국 시조 |
2 | 니차왕(尼次王) | ||
3 | 유충왕(幼沖王) | ? ~ 400년경 | 성산가야의 마지막 국왕 |
각주
[편집]- ↑ 〈성산가야(星山加耶)〉.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1년 12월 12일에 확인함.
같이 보기
[편집]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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