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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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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
性徹
출생1912년 4월 6일(1912-04-06)
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산청군
입적1993년 11월 4일(1993-11-04)(81세)
대한민국 경상남도 합천군 해인사
국적대한민국
종파조계종

성철(性徹, 1912년 4월 6일 (음력 2월 19일) ~ 1993년 11월 4일)은 대한민국의 스님이다. 호는 퇴옹(退翁)이고 속명(俗名)은 이영주(李英柱)이다. 근·현대 대한민국 불교사에 있어 선(禪)과 교(敎)를 아우르는 대표적인 큰스님이다.[1] 1912년 일제 강점기 조선 경상남도 산청 출생이며, 1993년 11월 4일 합천 해인사 퇴설당에서 입적하였다.

생애

[편집]

1912년(1세,壬子), 음력 2월 19일(양력 4월 6일)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묵곡리에서 아버지 율은(栗隱) 이상언(李尙彦, 1881~1959), 어머니 강상봉(姜相鳳, 1893~1957)의 4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다. 속명은 이영주(李英柱). 어머니가 스님을 임신하고서는 문밖 출입을 삼가고 모난 음식을 먹지 않고 모난데 앉지 않는 등 온갖 정성으로 태교하였다고 전한다.

1920년(9세, 庚申), 4월 단성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다. 입학하기 전에 서당을 다닌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26년(15세, 丙寅), 3월 단성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다. 진주중학교 입학시험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하였으나 신체검사에서 탈락하다. 원래 몸이 약했던 스님이 이 무렵부터 요양차 대원사에 드나들다.

1931년(20세, 辛未), 대원사에 드나들며 불교에 빠질 것을 염려한 집안에서 결혼을 서두르다. 11월 이덕명(1909~1982)과 혼인신고.

1932년(21세, 壬申), 12월 2일 간례휘찬(簡禮彙纂)에 이영주서적기를 남기다. 행복론,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역사철학, 장자남화경, 소학, 대학, 하이네 시집, 기독교의 신구약성서, 자본론, 유물론 등 동서고금의 철학에 관한 책 약 70여 권의 제목이 적혀 있다.

20세를 전후한 시기에 본격적으로 불교에 관심을 가지고 불교 관련 서적을 탐독하다. 영가현각(永嘉玄覺, 665~713)스님의 증도가를 읽고 밤중에 횃불을 만난 것 같았다고 회고하였다. 잡지 「불교」를 통해 화두 공부를 익히고 대원사 요양 중에 서장(책)을 보다.

1935년(24세, 乙亥), 이무 렵 대원사 탑전에서 화두참구하며 42일 만에 동정일여의 경지에 이르렀다. 대원사에서 해인사에 연락하여 환경스님(1887∼1983)의 제자 최범술(효당스님, 1904∼ 1979)이 대원사를 방문하다. 최범술의 권유로 스님이 해인사에 가다.

1936년(25세, 丙子), 1924년에 선원으로 확장된 해인사 퇴설당에서 참선 정진하다. 반대 여론이 있었으나 주지 이고경(李古鏡, 1882~1943) 스님의 호의로 정진을 계속하다. 해인사에서 강의하던 강사 김법린 (1899∼1964)이 교학 연구를 권하다. 3월 3일 범어사 조실 하동산(河東山, 1890~1965) 스님을 은사로 해인사에서 사미계를 받고 출가하다.

출가시

彌天大業紅爐雪이요 跨海雄基赫日露라

誰人甘死片時夢가 超然獨步萬古眞이로다

하늘에 넘치는 큰 일들은 붉은 화롯불에 한 점의 눈송이요

바다를 덮는 큰 기틀이라도 밝은 햇볕에 한 방울 이슬일세

그 누가 잠깐의 꿈속 세상에 꿈을 꾸며 살다가 죽어 가랴

만고의 진리를 향해 초연히 나 홀로 걸어가노라

동산스님을 따라 범어사로 옮겨 범어사 금어선원에서 하안거를 나다. 동산스님은 해인사 조실로 옮기고 스님은 범어사 원효암에서 동안거를 나다(조실 용성스님). 동안거 기간인 11월 18일(음 10월 16일) 용성(1864~1940)스님이 동산스님에게 계맥을 전수하는 자리에 스님도 함께 하다.

1937년(26세, 丁丑), 3월 15일 범어사 금강계단에서 비구계를 받다. 범어사 원효암에서 하안거를 나고 용성스님을 시봉하다. 용성스님은 그 무렵 어떤 스님을 보아도 스님이라 하지 않고 “선생”이라고 불렀는데 손자인 성철스님에게만은 “성철수좌, 성철스님”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서울 대각사로 옮겨 가실 때에 꼭 스님을 데려 가겠다고 했지만 스님은 부산역까지만 배웅하고 도망쳤다는 일화가 있다. 통도사 백련암으로 옮겨 동안거를 나다. 조실은 향곡스님의 은사인 운봉(雲峰, 1889~1946)스님.

1938년(27세, 戊寅), 범어사 내원암(1900년 개설)에서 하안거(조실 하동산)를 나고, 통도사 백련암에서 동안거를 나다. 이 무렵 까지도 어머니가 철마다 옷가지와 음식 등을 마련하여 찾아왔으나 계속 물리치다.

1939년(28세, 己卯), 금강산 마하연에서 동안거를 나다. 마하연선원은 1926년 재정 사정으로 문을 닫았다가 1932년 59칸짜리 당우를 짓고 다시 개원하였다. 1933년에는 입방규칙을 제정하여 자격을 갖춘 납자만 결제 대중으로 받기로 하였다. 1939년 3월 23일에는 선리참구원에서 전국수좌대회를 개최하여 금강산 마하연선원을 초학(初學) 수좌지도를 위한 모범선원으로 지정하기도 하였다. 워낙 규모가 커서 안거를 나는 대중들도 서로를 잘 몰랐다고 한다. 마하연에서 평생의 지기인 자운스님을 만나다. 글을 모르는 대중 스님들의 부탁으로 편지를 대독하고 대필해주기도 하였다. 어머니가 찾아왔으나 만나지 않다가 대중공사를 통해 금강산 유람을 시켜드리기도 했다.

1940년(29세, 庚辰), 금강산 마하연에서 하안거를 나다. 동화사 금당선원에서 오도송(悟道頌) 읊다.

오도송

黃河西流崑崙頂하니 日月無光大地沈이라

遽然一笑回首立하니 靑山依舊白雲中이로다

황하수 곤륜산 정상으로 거꾸로 흐르니

해와 달은 빛을 잃고 땅은 꺼지는도다

문득 한번 웃고 머리를 돌려 서니

청산은 예대로 흰 구름 속에 섰네.

깨달음을 얻은 이후 장좌불와를 시작하다. 은해사 운부암에서 동안거를 나면서 단식 정진하다.

1941년(30세, 辛巳), 깨달음을 점검받기 위해 전국의 곳곳을 찾아 정진하다. 전남 송광사 삼일암에서 하안거(조실 회주 이효봉) 를 나고 충남 수덕사 정혜사에서 동안거(조실 송만공)를 나다. 정혜사에서 청담스님을 만나다. 음력 정월에 조를 짜서 대웅전에서 일주일동안 철야정진하는 모습에 감동을 받고 이후 칠일칠야 정진의 모델로 삼다. 이 해는 아버지 이상언의 회갑이었다. 장남 없이 절을 받을 수 없다 하여 절도 받지 않고 가족사진 촬영도 하지 않았다.

1942년(31세, 壬午), 충남 서산군 간월암에서 하안거와 동안거를 나다 (조실 송만공).

1943년(32세, 癸未), 충북 법주사 복천암에서 하안거를 나다. 1942년 가을 청담스님이 먼저 복천암에 가고 스님이 합류하다. 복천암에서 도우스님을 만나 이후 도우스님이 대승사, 봉암사, 천제굴까지 함께 하다. 청담, 도우스님 등과 생식을 시작하다. 청담스님이 독립운동 혐의로 체포되어 상주경찰서에 연행되었다가 이질에 걸려 피병사로 옮겨지고 상주포교당으로 주거 제한을 받다. 스님은 대승사로 가려고 했으나 식량 사정의 여의치 않아 종수스님과 장수스님이 있는 경북 선산 도리사 태조선원에서 동안거(조실 정운봉)를 나다.

1944년(33세, 甲申), 도리사 태조선원이 폐쇄되어 도리사에서 머물다. 청담스님이 거주 제한이 풀려 대승사로 옮기고 스님을 초청하여 경북 문경 대승사 쌍련선원에서 청담, 우봉, 도우스님과 동안거를 나다.

1945년(34세, 乙酉), 대승사에 쌍련선원에 머물며 청담스님과 총림의 구상과 바른 수행 풍토에 대해 논의하다. 대승사 암자인 묘적암에서 동안거를 나다.

1946년(35세, 丙戌), 송광사에 방부를 들이려다가 생식을 이유로 거절당하다. 송광사에서 일타스님을 만나다. 도우스님과 성전암 으로 옮겨 하안거와 동안거를 나다. 이 무렵 청담스님이 봉암사 주지의 요청으로 봉암사로 옮기다. 청담스님이 홍경, 종수스님 등과 봉암사에서 새로운 불교를 모색하다가 해인사에 가야총림이 개설된다는 소식에 스님과 청담스님이 해인사측의 최범술, 환경스님(당시 주지)을 만났으나 재정 문제가 걸려 타협이 결렬되다. 가야총림은 방장에 효봉스님을 추대하고, 우봉스님은 총림에 합류하다.

1947(36세, 丁亥), 총림 건은 청담스님에게 일임하고 도우스님과 통도사 내원암으로 옮기다. 청담스님이 하안거에 가야총림에 합류하다. 김병룡 거사에게 불서를 기증받기로 약속하고 해제하면 봉암사로 옮기기로 하다. 가을에 봉암사 결사를 시작하다. 기본적으로는 성철, 청담, 자운, 우봉스님 네 분의 구상으로 진행된 봉암사결사는 공주규 약을 체결하고 "부처님 법대로 살자"를 목표로 하였다. 청담스님의 추천으로 봉암사를 정하고 처음에는 성철, 자운, 보문, 우봉스님의 네 분이 시작하였다. 청담스님은 가야총림 때문에 뒤늦게 합류하다. 향곡(香谷), 월산(月山), 종수(宗秀), 도우(道雨), 보경(寶境), 법전(法傳), 성수(性壽), 혜암(慧菴)스님 등 20여 명으로 구성되어 신장 등을 없애고 장삼과 가사, 발우 등을 정비하였으며 신도에게 3배와 보살계를 처음으로 시행하 였다. 중국 총림의 일과에 맞게 생활하고 대불정능엄신주를 독송하도록 하였으며 대부분의 사찰에서 하고 있는 예불문을 완성하였다. 교단 정화는 물론 주요 인물들이 조계종의 요직을 맡으며 종단의 기틀을 마련 하였다.

1948년(37세, 戊子), 봉암사에서 하안거와 동안거를 나다. 김병룡거사에게 불서를 기증받고 봉암사 극락전에 모시다.

1949(38세, 己丑), 봉암사에서 하안거를 나다. 빨치산이 출현하여 정진이 어려우므로 경남 월내리의 묘관음사로 옮기다. 김병룡거사의 불서도 묘관음사로 옮겼으며 이후 계속 거처를 옮길 때마다 불서를 옮기다.

1950년(39세, 庚寅), 청담, 법전스님 등이 봉암사를 나오면서 봉암사결사가 무산되다. 경남 고성군 문수암에서 청담, 법전 등과 하안거와 동안거를 나다.

1951년(40세, 辛卯), 경남 통영의 안정사 은봉암에서 하안거를 나다. 모이는 사람이 늘자 안정사 주지에게 양해를 구하고 안정사와 은봉암 사이에 초가삼간의 토굴을 지어 천제굴이라고 이름하다. 주로 시봉은 법전스님이 맡다. 천제굴에서 비로소 신도들에게 3천배와 아비라기도를 하게 하다.

1952년(41세, 壬辰), 천제굴에서 하안거를 나다. 천제굴에 머무시는 동안 청담, 자운, 운허, 향곡, 서옹스님 등이 다녀가다. 천제굴이 협소해 비구니 스님들이 성철스님이 수행할 수 있도록 성주사를 내주어 경남 마산의 성주사에서 동안거를 나다.

1953년(42세, 癸巳), 천제굴에서 하안거와 동안거를 나다.

1954년(43세, 甲午), 천제굴에서 하안거와 동안거를 나다. 비구 종단의 정화(淨化)가 시작되다.

1955년(44세, 乙未), 파계사 한송스님의 초청으로 파계사 성전암으로 옮기시려다가 건물 보수를 위해 법전스님이 먼저 수리를 하고 스님은 임시로 경남 남해의 용문사 백련암에 머물다. 9월 비구측이 19개 사찰의 관리권을 접수하면서 해인사지로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자운스님이 취임(1955년 9월 ~1957년 7월)하다. 가을에 파계사 성전암에 철조망을 두르고 1964년까지 10년간 두문불출하며 외부의 출입도 막다. 이것을 흔히 “10년 동구불출”이라고 하다. 동구불출 동안 거의 모든 시간을 책을 읽으며 보내다. 일본의 남전대장경은 물론 영문 잡지와 다양한 분야의 신종 서적을 섭렵하다.

1957년(46세, 丁酉), 파계사 성전암에서 동구불출하다. 다시 해인사의 주지로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청담스님이 취임(1957년8월~1960년 5월)하다.

1964년(53세, 甲辰), 동구불출을 마치고 부산 다대포에서 잠시 머무르다가 서울의 도선사에 머물다. 도선사는 1961년에 청담스님이 주지로 취임. 오랜 시간 꿈꾸어 오던 승가대학을 실현하기 위해 실달학원 (悉達學園)을 열고 실달학원시행요강을 마련하다. 청담스님과 서원문을 쓰다. 이 무렵 청담스님과 함께 각각의 시자 천제스님과 혜성스님을 데리고 북한산, 남한산성, 회암사지 등을 순례하다.

1965년(54세, 乙巳), 4월 30일 동산스님이 입적. 1967년에 세운 동산스님 사리탑 비문을 짓다. 경북 문경의 김용사(金龍寺)에서 조실로 머물다. 9월 1일, 대학생불교연합회 회원들의 13일간의 구도행각 중에 김용사 방문하자 3000배를 시키고 9월 2일부터 이틀에 걸쳐 “불교의 근본사상인 이변(離邊)중도로부터 시작하여 불교에서 본 우주의 실상, 우리가 이 실상과 하나가 될 수 있는 가능성, 그 방법론 등”을 현대 학문의 방증을 들어 설법하다.

1966년(55세, 丙午), 1월 8일(토, 음 12월 17일)부터 2월 20일(일, 음 2월 1일)까지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 구도부를 상대로 50일 안거 정진을 지도하다. 참가자는 광덕스님을 지도법사로, 박성배를 지도교수로 한 봉은사 입사생인 전창열, 김금태, 이진두, 김기중, 황귀철, 김선근, 이철교.

스님의 강론 내용은 ① 불교의 생명은 覺에 있다. ② 불교 근본원리로서의 중도사상 ③ 돈오점수설 비판 ④ 현대 과학과 불교의 합리성.

4월 스님의 발원으로 1965년 8월에 공사를 시작한 선방 상선원을 준공하다. 8월 3일부터 8월 24일까지 한 국대학생불교연합회 구도부(봉은사 입사생 중심) 구도법회를 지도하다. 참선정진을 중심으로 하고 20일 간 반야심경으로 시작하여 육조단경, 금강경, 신심명, 증도가 등의 경론과 중도법문을 하다. 이것을 ‘운달산법회’라고 하며 최초의 대중설법으로 기록된다. 가을 무렵 자운스님의 권유로 해인사 백련암으로 옮겨 동안거를 나다. 구도법회 참가자 일부가 스님을 따라 백련암으로 옮기고 출가하다. 11월 6일 월정사 대웅전 상량식에 참가하다.

1967년(56세, 丁未), 7월 25일 제16회 임시중앙종회에서 해인사에 방장 체제의 해인총림 설치가 결의되면서 해인총림 방장에 추대되다. 방장 동안은 안거 때마다 보름과 말일에 상당법어를 하다. 동안거 기간 중에 백일법문(百日法門)을 하다. 10월 보름과 말일 상당법어 진행 후에 음력 11월 3일(월, 12월 4일)부터 시작하여 상당법어를 하는 날과 성도재일 용맹정진 등 특별한 날을 제외하고 매일 진행하다. 대략 이듬해 음력 1월 20일(일, 2월 18일)까지 진행되어 백일법문이라고 한다. 12월 15일 조계종 제17회 중앙종회에 조계종 종합수도원인 해인총림의 계획안과 승가대학 설치계획안을 건의하다.

1969년(58세, 己酉), 10월 희찬스님이 월정사 대웅전을 중건하다. 이 무렵 청담스님 등과 춘천 성심여자대학을 방문하여, 다른 종교 의 교육기관을 시찰하고 승가대학에 대한 방향을 모색하다

1976년(65세, 丙辰), 한국불교의 법맥이 출간되다. 비구ㆍ대처 분규 끝에 1962년 3월 22일에 제정된 대한불교 조계종 종헌 제1조 "본 종은 신라 도의(道義)국사가 창수(創樹)한 가지산문(迦智山門)에서 기원하여 고려 보조국사의 중천을 거쳐 태고 보우국사의 제종포섭(諸宗包攝)으로서 조계종이라 공칭(公稱)하여 이후 그 종맥이 면면부절(綿綿不絶)한 것이 다."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며, "도의국사는 가지산문이고 보조국사는 사굴산문이니 법맥이 상전(相傳)한 것이 아닌데 어떻게 다른 법맥을 같은 법맥으로 할 수 있느냐?" 임제종의 종풍을 이어받은 조계종의 종조는 보조국사가 아니라 태고보우국사라는 주장을 펼치다.

1981년(70세, 辛酉), 1월 20일 조계종 6대 종정으로 취임하였으나 취임법회에는 나가지 않으시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법어가 화제로 등장하다.

[종정수락법어]

원각(圓覺)이 보조(普照)하니 적(寂)과 멸(滅)이 둘이 아니라

보이는 만물은 관음(觀音)이요 들리는 소리는 묘음(妙音)이라

보고 듣는 이 밖에 진리가 따로 없으니

아아, 시회대중(時會大衆)은 알겠는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초파일에 최초의 한글법어 “생명의 참모습”을 발표하다. 12월 스님의 사상을 대표하는 『선문정로』가 출간 되다. 총 19장으로 구성되어, 각 경론의 구절을 초록하고 이에 대한 성철스님의 평석을 붙여 돈오돈수를 설파하다.

1982년(71세, 壬戌), 1월 첫 한글 신년법어 “만법이 불법”을 발표하다. 11월 또 하나의 대표작인 본지풍광이 출간되다. 해인사 방장 으로 취임하신 1967년 동안거 결제 법어부터 1982년 하안거 결제 법어까지 상당법문을 모은 법어집으로, 본칙 91칙과 낙수법어(落穗法語) 9칙으로 구성되었다.

1986년(75세, 丙寅), 4월 7일 종단이 안정되었으므로 종정을 사퇴한다는 사퇴서를 원로회의에 제출하다. 6월 돈오입도요문론 강설과 신심명ㆍ증도가 강설이 출간되다.

1987년(76세, 丁卯), 6월 「자기를 바로봅시다」 가 출간되다. 종정 취임 이후 출간 당시인 1987년 무렵까지 대중적인 글들 위주의 법어 모음으로, 제1장 ‘축복의 말씀’은 종정 취임 후에 발표하신 신년법어와 초파일법어와 종정법어를 모은 것이고, 제2장 ‘가야산의 메아리’는 해인 사 큰법당에서 불교 진리를 쉽게 설명하신 법어 중 해인지에 연재하였던 것을 재정리하여 모은 것이며, 제3장 ‘대담’은 종정으로 취임하신 후 일간지 및 월간지에 인터뷰로 실린 것이고, 제4장 ‘본지풍광평석’은 본지풍 광 가운데 다섯 개의 법문(제27칙, 제28칙, 제30칙, 제40칙, 제44칙)을 골라 평석을 붙인 것이며, 제5장 ‘해탈의 길’은 처음 출가한 승려들이 신심을 가지고 열심히 수행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지어두신 글들을 정리하여 옮긴 것이다. 7월 백련불교문화재단을 설립하다. 11월 도서출판 장경각을 설립하여 선림고경총서 발간을 시작하게 하다.

1988년(77세, 戊辰), 2월 『돈황본 육조단경』이 출간되다.

1991년(80세, 辛未), 1월 종정의 임기가 만료되었으나 종단의 분열로 종정을 추대하지 못하다. 분열 와중에 종정 추대가 문중 문제로 불거지자 1월 23일 종정직을 할 생각이 없다는 통고문을 보내다. 7월 5일에 또 한 번 통고문을 보내다. 7월 8일 해인사에서 전국승려대표자대회를 열고 원로회의에서 종정을 추대하고, 개혁위원회를 구성하다. 세간법에 의한 송사는 종단법으로 엄단 등을 결의하고, 8월 22일 조계종 원로회의에서 제7대 종정으로 다시 스님을 추대하다.

1992(81세, 壬申), 4월 『백일법문』 상․하가 출간되다.

1993(82세, 癸酉), 9월 21일 선림고경총서 완간 기념회를 열다. 10월 7일 백련불교문화재단 주최로 해인사에서 '선종사에 있어서의 돈오돈수사상의 위상과 의미'라는 주제로 국제학술회의를 개최하다.

열반송

生平欺誑男女群하야 彌天罪業過須彌라

活陷阿鼻恨萬端인데 一輪吐紅掛碧山이로다

일생동안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

하늘 넘치는 죄업은 수미산을 지나친다

산 채로 무간지옥에 떨어져서 그 한이 만 갈래나 되는데

둥근 한 수레바퀴 붉음을 내뿜으며 푸른 산에 걸렸도다.

이후 전국 각지와 해외 동포 사이에서 추모 물결이 일다. 11월 10일 영결식 및 다비식을 봉행하여 11월 12 일 100여과에 이르는 사리를 수습하다. 1998년 11월 해인사 운양대에 사리탑을 봉안하다. 2001년 3월 경남 산청군 단성면 묵곡리 생가터에 기념관을 건립하고 겁외사를 창건하다.

교리적 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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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오점수를 반대하며 돈오돈수 주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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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스님의 선불교 교리의 사상적 견해는 저서인 《선문정로》(1981)에 잘 나타나있다.[1] 대한민국 선불교의 수행 전통으로 여겨온 '깨달음 이후에 점차 수행해 나아가는' 지눌돈오점수(頓悟漸修)에 반대하여 '깨달음 이 후에는 더 닦아야 할 수행이 필요 없다'고 하는 돈오돈수(頓悟頓修)를 주창했다.[1] 그 후 현재까지 대한민국 불교 철학계의 돈 · 점 논쟁은 활발하게 이루어져 왔다.[1] 성철은 지행합일(知行合一) 단계의 지(知)만이 진정한 지(知)이고 지눌돈오점수는 실제(實際)이고 세부까지 포함한 현실을 좇지 않는 직접 지각하거나 체험할 수 없는 관념과 표상(表象)에 경도(傾倒)되어 실증성이 희박(稀薄)하게 조직된 이론에 근거한 지(知)일 뿐 참 지(知)가 아니라고 주장(主張)하였다.[1] 그러나 지눌과 성철은 가르침의 대상이 달랐으므로 시비(是非)를 가리기가 어렵다.[1] 지눌은 일반인에게 불교 교의를 풀어서 밝혔고 성철은 수행하는 승려에게 설법하였다.[1]

하지만, 향곡혜림(香谷慧林)과 서옹상순(西翁尚純)은 돈오돈수론자들이였다. 도림법전(道林法典)과 혜암성관(慧庵性觀) 또한 철저한 돈오돈수론자들이였다. 그리고 진제법원(真際法遠) 스님 또한 '돈오돈수는 오종(五宗) 가풍의 법칙입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보다 자세한 사항은 문광스님 著, 탄허학, 조계종출판사 출판, 제 4장의 현대 한국 선사상의 두 지평 p.186~p.189참고 바람.)

돈점논쟁은 관법(觀法)과 간화선 사이에서, 혹은 교종과 선종 사이에 우열을 가리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누군가 이것을 그렇게 이해했다면, 그것은 이 논쟁의 본질을 잘못 파악한 것이다. 돈오돈수론 주장은 선종에 속한 스님들이 제대로 수행을 하기 위한 노력이었을 뿐이다. 돈오돈수를 주장하는 것이 교종이나 관법을 무시하는 것으로 이어지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원효스님 같은 분은 교학자였지만 현대 한국의 선사들 중 그 누구도 원효를 지해종도(知解宗徒)라고 부르지 않는다. 원효스님은 교(教)의 길을 철저하고 뛰어나게 걸어갔던 것이다. 그리고 성철스님의 돈오돈수론 주장도 선(禪)의 길을 본분사대로 걸어갔던 것 뿐인 것이다.

대처승에 반대하는 불교정화운동 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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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스님은 대처불교로 대변되는 근대 일본불교의 잔재를 청산하고 부처님의 정법으로의 복귀를 통해 현대불교의 새로운 길을 모색하겠다며 1947년 공주규약을 함께 제정한다.[2] 이것은 1954년 비구승들이 본격적으로 추진한 불교정화운동이었고[3] 만해스님은 전인적 풍모를 가진 인물로 사회참여를 통해 역사적 현장에 투신한 반면, 성철스님은 철저히 세간사에 대해 불간섭의 자세로 오로지 깨달음을 얻겠다는 종교적 이상만으로 근현대라는 시공이 초래한 질곡에 휘말리지 않았다.[2]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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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대륙에서 임제종(臨濟宗)을 개종(開宗)한 임제(臨濟)의 후예(後裔)인 선사(禪師) 유신(惟信)이 선종의 내밀(內密)한 특징인 소위 도교에서 영향받은 화광동진(和光同塵)을 교시(敎示)하려는 취지(趣旨)로 한 설법(說法)인,

  • “내가 삼십 년 전 참선하기 전에는 산은 산으로, 물은 물로 보았다가 나중에 선지식(善知識)을 친견(親見)하여 깨*침에 들어서서는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게 보았다. 지금 휴식처를 얻고 나니 옛날과 마찬가지로 산은 *다만 산이요, 물은 다만 물로 보인다. 그대들이여, 이 세 가지 견해가 같으냐? 다르냐? 이것을 가려내는 사람이 *있으면 나와 같은 경지에 있다고 인정하겠노라.”

중에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고측(古則)을 성철이 원용(援用)하여 인상(印象)을 남기면서 일반인에게도 유명해졌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화두(話頭)는 최초에 미망(迷妄)하는 단계는 수도(修道)하기 이전 평범한 일상계(日常界)이나 수도를 이용해 득도(得道)하면 체험하는 평범한 일상을 완벽히 초월한 세계는 일상에서 하는 착각(錯覺)이 적멸(寂滅)한 상태이나 진정하게 득도하려면 거기서 진일보(進一步)해 평범한 세계로 회귀하여야 한다. 화광동진을 이용해 다시 돌아온 그 세계는 외양상으로는 최초처럼 속(俗)되고 평범한 단계와 같으나 내면상으로는 처음과는 차원이 판이(判異)하다. 이는 나선형(螺旋形) 성격을 띤 회귀를 뜻한다. 이로 보아 임제(臨濟)의 후예(後裔)인 선사(禪師) 유신(惟信)이 설법한 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공안(公案)은 노자의 화광동진(和光同塵) 사상을 그대로 해설한 교시(敎示)이다. 재언하면, 수도자(修道者)가 작고 대수롭지 않게 득도(得道)했을 때는 물이 산으로, 산은 물인 듯 혼란(混亂)스럽지만, 득도하는 규모가 확대되면 물은 물로, 산은 산으로 보게 된다. 외부 세계나 자연을 주관의 작용과는 독립하여 존재한다고 관망(觀望)하는 태도를 획득한다는 뜻이다.

깨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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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24세에 출가한 성철스님(1912년-1993)은 승납 3년만인 1940년 28세 때, 대구 동화사 금당선원에서 하안거를 보내며 수행하던 중 문득 대오했다. 당대의 선지식은 75대 경허(1849-1912)스님으로부터 76대 만공(1871-1946)스님이 깨달음의 도를 이었다고 하던 시절이어서, 정혜사의 만공스님을 찾아갔는데, 깨달음의 깊이에 실망을하고 또 쉽게 깨달음을 인가하고 있었기 때문에 실망을 하게 된다. 이후에 76대 만공스님의 도를 77대 전강(1898-1975)스님이 이었다고 했는데, 전강조사에게도 인가를 신청하지 않았다.

불교에서는 다른 깨달은 선지식으로부터의 인가는 중요하게 다루지 않아도, 당대 조사스님의 인가는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당시 불교 관행이, 별로 큰 깨달음도 아닌데 쉽게 인가를 해주는 관행이었다고 하더라도, 조사의 인가는 반드시 받았어야 했다.

역대 최장 기록의 장좌불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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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스님의 열반 시기에 대중들에게 갑자기 유명해진 불교 수행용어가 장좌불와인데, 달마대사의 소림사 면벽 9년의 면벽은 이와 비슷하나 난이도에서 장좌불와에 못미친다.[4] 현재 성철스님보다 오래 잠을 자지 않고 장좌불와를 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으며, 기록은 10년, 일부에서는 8년이라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4] 이 깨달음 이후의 오후보임(悟後保任)의 행 때문에 후학 수행자들이 억지로 따라하며 건강을 해쳐 병원 치료도 하게 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5]

주요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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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인총림 초대 방장
  • 前 [대한불교 조계종] 제 6대, 7대 종정

이외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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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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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조단경(六組檀經)》, 《전등록(傳燈錄)》 등 선문(禪門)의 조사(祖師) 어록을 중심으로 많은 법어를 이루었는데 관념의 도그마(dogma)[주해 1]에 빠지지 말 것과 견성(見性)의 체험을 강조하였다. 1993년 해인사에서 입적(入寂)하였다. 저서로 《돈오입도요문강설》(1986) 등이 있다.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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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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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논리에 맞고 이성에 근거한 증명과 비판이 불허(不許)되는 종교상 원리나 이치와 종교의 신앙 내용이 진리로서 공인된 종교상 교법(敎法) 그리고 종교상 신조를 통칭(統稱)하는 말이다.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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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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